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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0230817 Do 가끔은 브레멘 가서 일하기

by Kiaa 202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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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을 바꾸고 나서 브레멘에 안 간지 너무 오래됐다. Rom에게 "나 오랜만에 브레멘 갈까? 나 가면 점심으로 쌀 먹으러 갈 거야? 밥 잘하는 식당 찾아놔야 돼, 알겠지?"하고 신신당부를 해놨다. 혼자 기차 타고 브레멘까지 가기에는 조금 심심하니 몇몇 다른 함부르크에서 일하는 친한 회사 사람들을 꼬셨다. Lin은 "Rom이 너 꼭 데리고 오랬는데! 너 브레멘에서 일 안 해봤다고 이번 기회에 같이 오랬는데! Rom이 밥 잘하는 곳 찾아서 우리 데려가주겠다고 했는데 정말 안 갈 거야?!"라고 꼬셨고, Vin은 내가 "브레멘.. 점심.. 밥 잘하는 곳.. Rom이 우리를 기다려..." 하니까 별 고민 없이 ok 했다.
 


 
아침부터 아주 함부르크 답게 우중충 했고, 우중충할 때 우중충한 중앙역 오니까 혼자가는게 아니여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기분이 축 처졌을 거다.

 
Rom은 전에 내가 하는 밥타령을 아주 재미있게 들어주고는 내가 파스타나 피자 혹은 빵을 먹을 때마다 " Meine Liebe, 쌀 못 먹어서 어떻게? 밥 없으면 그건 식사가 아니잖아"하고 장난을 치곤 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이 날 나를 태국 식당에 데려갔다. 내가 원하는 건 날아다니는 쌀 아니고 붙어서 안 떨어지는 쌀 (Klebreis)이었어서 태국 식당에 간다는 말에 전혀 기대 안 하고 갔다. 
 

 
근데 진짜 기대 안 하고 갔는데, 뭐야 이거.. 쌀 진짜 맛있네 여기? 그래서 Rom에게 독일에 있는 식당에서 먹어본 쌀 중에 제일 맛있는 쌀이라는 평가를 내줬다. Klebreis는 아닌데 그렇다고 윤기 없이 날라다니는 그런 쌀도 아닌 좀 통통하고, 기름에 잘 볶아져서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문제는 또 쌀만 맛있고 다른 게 그냥 그랬다는 점. 하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점심이었어서 기분 좋아져서 가을에 갓 수확한 햅쌀로 밥을 하면 밥 알갱이 하나하나가 얼마나 반짝이고 윤기가 흐르는지, 얼마나 남다르게 맛있고 살살 녹는지 이야기해 줬다. 같이 이야기를 듣던 다른 동료가 그렇게 맛있으면 다음에 가져와서 맛 보여줘라고 장난 식으로 말했는데 무거워서 못 가져오고, 가져와도 제대로 된 전기밥솥이 없어서 못 해준다고 밥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밥 먹고 후식으로 젤라또도 샀다. 스니커맛으로 골랐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스니커 아이스크림 중에 제일 맛없었다. 사자마자 얼른 사무실 가자고 회사 사람들을 재촉했다. 오늘 오전 내내 통관 문제로 바빴는데 오후에도 내내 정신없이 일 해결하느라 바쁠 예정이었다. 하필 브레멘 오는 날 다들 업무량 적당히 있는데 나만 발등에 불 떨어져 있었고, 다른 동료들이 안 바쁜걸 부러워할 틈도 없었다. 그래도 브레멘 안 왔으면 점심도 대충 먹고 머리 싸매고 끙끙댔을 텐데 제대로 점심 먹고 기분 전환하니 좋았다. 
 
오후에 일 하면서 다행이었던 건 하필 브레멘 사무실에 procurement 팀에서 일하는 Arn이 있어서 여러 가지로 즉석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통관 절차로 인해서 고객한테 1400유로를 승인받을지 아니면 우리 선에서 다른 운송사를 찾을지 고민 중이었는데 Arn이랑 통관 쪽에서 일했던 Mar까지 와서 어떻게 하는 게 고객도 좋고 우리도 일이 적은 방법일지 같이 의논할 수 있었다. 
 


 
 
퇴근 후 Rom이 브레멘에 작은고 예쁜 길거리가 있는데 거기 가자며 우리를 데려갔다. 

 
사람들 옷차림만 보면 지금은 절대 8월 중순 같지가 않다. 나 역시도 반팔에 맨투맨을 입고 스카프를 한 채로 걸어 다녔다. 날은 흐려도 관광객은 꽤 있어서 브레멘 음악대 동물들 동상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저 당나귀 다리 잡으면 돈이 들어온대서 나도 작년에 왔을 때 여기서 저 당나귀 다리 잡고 사진 찍었었다.
 

 

Rom이 숨은 구경거리라면서 보여준 이것! 저기에 동전 넣으면 브레멘 음악대 동물 소리가 나온다. Rom이 동전을 넣자 조금 정성 안 담긴 녹음 소리가 흘러나와서 웃겼다. 디테일이 독일스럽다.
 

 
그리고 도착한 오늘의 목적지. 아기자기한 집들이 늘어져있고 작은 카페와 상점들이 있는데 너무 상업적이지 않아서 아늑하게 예쁜 거리였다. 전에 인스타그램 릴스에서 추천 관광지로 나온 걸 본 적 있는데 브레멘 근처에 산다면 모를까, 브레멘 관광 오는 거 진짜 비추다. 예전에 교환학생 때 브레멘 음악대에 혹해서 삼일 여행 왔다가 대대대 실망하고 갔던 적이 있다. 브레멘만의 역사와 행사 뭐 그런 거가 목적이 아닌 이상은 도시 관광만 따졌을 때 브레멘은 그냥 어쩌다가 출장 와서 퇴근하고 한두 시간 구경할 때 괜찮은 정도이다.
 

 
그래도 같이 있는 사람이 좋으면 뭘 봐도 즐겁고 뭘 먹어도 신나는 법이다. 함부르크에서 재택근무 했으면 퇴근하고도 일생각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저녁 내내 헤롱거렸을 것이다. 업무 중에 문제가 생기면 너무 과몰입하다 보니 퇴근 후 저녁시간도 고달프게 느껴지는데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랑 같이 와서 돌아다니니까 일 생각 없이 브래멘의 거리들을 구경하고 있는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날씨가 우중충한 건 사실이니 나중에 해 뜨고 예쁠 때 한 번 더 오자고 얘기했다.
 

 

작은 골목길 안에 숨어있던 기념품 가게

 

저 길 뒤로 예쁜 크리스마스 상점이 있었는데 저녁 6시에 가니 이미 문을 닫아서 안에는 보지 못했다.
 

 
저녁은 여기에서 먹었는데 넷이서 타파스 세트 두 개 시키니까 딱이었다. 내부가 굉장히 아늑했고 음식도 나름 괜찮았다. 
 
 

저녁 8시 반이라 이제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Rom이 중앙역까지 데려다주고 나는 Vin이랑 Lin이랑 기차 타고 함부르크에 왔다. 기차 안에서 우리 셋이 너무 신나서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 셋다 어떻게 독일로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다 보니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Vin은 내가 한국에서 오스트리아로 갈 때 10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가는 건 너무 재미없어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버스를 타고 유럽에 들어갔단 이야기를 엄청 인상 깊어했다. 몇 살이었냐고 묻길래 만 나이 계산해 보니 24살이었다. 엄청 어렸는데 대단하네,라고 하길래 "그런가..? 음. 그러게.... 근데 한국에서 일을 못 구해서 어떻게든 떠나야 했고 떠나가는 과정은 그래도 나름대로 즐거웠어"라고 대답했다. 우리 셋다 독일에 깊은 뜻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었다. 서로서로에게 고생했네, 잘 정착했네, 자랑스럽다, 회사에서 이렇게 서로를 알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 등등 따뜻한 말을 많이 나누었다.
 

 
기차 타고 함부르크 잘 가고 있다고 셋이서 셀카를 찍어서 Rom에게 사진을 보냈다. 사진을 받아 본 Rom이 너네 왜 2004년에 가 있냐면서 울면서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브레멘에 갔다가 시간여행까지 하고 온 멋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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