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2020), 272쪽 _ SF 단편 소설 8편

by Kiaa 2021. 6. 12.
반응형

 

목차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11분의 1
리셋
모조 지구 혁명기
리틀 베이비블루 필
목소리를 드릴게요
7교시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읽게 된 계기

문득 내 전자도서관 서재에 들어가 보니 대출되어 있었다. 아마 언젠가 예약 신청을 해 놓고 나서 깜박한 것 같았다. 내 뒤로도 예약 대기가 한참 남아있는데 하필이면 대출된 걸 알게 된 날이 반납 예정 이틀 전이었다.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미뤄 둘 수 있는 기간이 아니라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냐면

굳이 블로그에 '책'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아직 책을 다 읽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독후감을 쓰고 있을 정도로 재미있다. 아직 다 안 읽었다. 아까워서 빨리 못 읽겠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어서 빨리 읽힌다. 굉장히 흥미롭고, 단편 중 하나인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는 중간에 너무 웃겨서 소리까지 냈다. 이 책은 진짜 종이책으로 소장해야 한다. 표지도 얼마나 잘 뽑았는지! 책 내용에도 치이고 책 표지에도 치였다. 이미 주변 사람들한테 읽으라고 카톡도 보내 놨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라는 책(비문학)을 읽었었다. 결국 다 읽지도 못했는데 한 달 읽다가 너무 우울해졌고, 세상은 썩었고 불합리에 차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었다. 그 책을 읽고 상처까지 받을 정도였는데  『목소리를 드릴게요』 덕분에 다시 기운이 샘솟았다.

 

키워드

에코페미니즘, 포스트 아포칼립스 픽션

 

 

좋았던 장면들 & 문장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들 무해하다. 분명 지구 멸망 후의 이야기나 외계인에게 납치당하는 이야기들을 읽고 있는데 그 이야기들이 너무 행복했다.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은 읽히는 속도감에 깜짝 놀랐고, <11분의 1>에서는 사람들이 무해하다는 걸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다소 지쳐 있던 차에, 축제에 나온 NHT의 텐트 아래에서 그 사람들이 케이크를 먹으며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 걸 봤어요. 주사위를 던지며 수달 같은 소리를 냈죠. 성별에 상관없이 그저 좋은 생물들 같았어요. 나한텐 저런 집단이 필요해, 싶었달까요? (26쪽, 11분의 1)

 

<리셋>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통화하면서 '한 번만 더 당신의 냄새를 맡고 싶어(사실은 귀 냄새라고 했음)' 라고 했던 장면, 앤이 '왜 그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는지' 깨닫고 우는 장면,  아미가 묘사하는 해방 이후의 날들, 돼지들, 더이상 파괴적으로 과잉 생산하지 않는 사람들. 이 단편을 읽고 나서 앞으로 식재료는 마트가 아니라 시장에서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일 재래시장은 왠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둘러만 보고 구매한 적은 없는데 이번 기회에 꼭 시도해 봐야겠다. 

<리셋>은 계속 쓰고 싶었던 소설이었다. 거대한 지렁이들이 인류 문명을 갈아엎는 이야기를 짧게 여러 번 써서 합쳤다. 나는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의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봐 두렵다. 지금의 우리가 19세기와 20세기의 폭력을 역겨워하듯이 말이다. (255쪽, 작가의 말)

 

<모조 지구 혁명기>에 나오는 천사가 나팔꽃 언니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놀랐고, <리틀 베이비블루 필>에서 하나의 작은 발명이 얼마나 큰 변화를 야기하는지를 보면서 또 놀랐다.

인물들의 성별을 모호하게 수정했는데, 어떤 성별로 이 이야기를 읽으셨는지 궁금하다. 한국어는 그런 작업이 가능한 언어라 즐겁다. (257쪽, 작가의 말 중 <모조 지구 혁명기> 설명)
아직 지치지 않은 보호자들만이 조금 다르게 약을 사용했다. "우리는 지금 소풍을 왔어요. 밤에 혼자 깨서 무서우실 때 이 소풍을 떠올리시면 좋겠어요. 소풍 생각을 하시며 다시 잠드시면 좋겠어요. 이 날씨를, 이 나무 그늘을, 우리 표정을, 같이 부른 노래를 자꾸 생각하시면 좋겠어요." (127쪽, 리틀 베이비블루 필)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 경모가 했던 짧지만 강한 항변이 슬펐고 인상 깊었다. 연선을 구하기 위해 라디오 수신기를 단 구명조끼를 매고 노래를 부른 승균, 시체를 먹는 수현 등 이 단편뿐만 아니라 이 책에 수록된 모든 등장인물들이 너무 좋았다. <7교시>와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를 읽을 때는 책을 벌써 다 읽어간다는게 너무 아쉬웠다.

승균은 흙을 뱉어내며 조각 난 부품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하나의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또 찾을 것이다. 어떻게든 연선을 내보낼 거라고, 강한 의지는 무감각에 가까운 평정심으로 느껴진다는 걸 처음 깨달으며 생각했다. (197쪽, 목소리를 드릴게요)
2백여 년 전 사람들은 기쁠 때도 위로가 필요할 때도 서로 고기를 사주었다고 한다. '고기를 사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고 말하는 옛 영상 자료들을 보면 뜨악했다. (210쪽, 7교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자가 아닌 익명의 공동체 유전자를 원했다. 닮은 대상이 아니라, 닮지 않은 대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218쪽, 7교시)

 

책을 읽고 나니 뭔가 머릿속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즐거운 명상을 하고 난 기분도 들었고 상쾌했다. 한국 가면 종이 책으로 꼭 다시 읽어야지. 이번 주는 이 책 덕분에 활기찼다.

장르문학을 쓸 때도 쓰지 않을 때도 나는 한 사람의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253쪽, 작가의 말)

 

 

같이 읽을 만한 책

  1.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작가가 이 책의 특별판 편집을 맡았다가 한국에 수용소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다가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썼다고 한다.
  2. 『무민은 채식주의자』 : '동물권'을 테마로 한 소설집. 정세랑 작가의 '7교시'도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3. 윌슨 『지구의 절반』

 

반응형